오래된 인연이 열어준 기회의 통로
탐앤탐스 카이스트점, 오후 2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창가 자리에 앉았다. 교수님과의 만남을 앞두고 마음은 이미 긴장으로 가득 찼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자문을 구할지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려보았다.

1시 55분, 긴장감에 화장실을 다녀왔다. 2시가 되었지만 아직 교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귀중한 생각 정리의 기회로 느껴졌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리고, 그동안 늦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목을 많이 쓰시는 일을 하시니 작지만 목에 좋은 꿀을 준비했습니다…’ 머릿속으로 인사말을 되풀이하며, 궁극적으로 묻고 싶은 두 가지를 정리했다. 커리어 전환을 앞두고 어떻게 준비하면 경쟁력이 있을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지.
그때, 저 멀리서 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누군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한눈에 교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떤 준비했던 말도 무의미하게 순수한 반가움이 먼저 튀어나왔다.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랜만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근황 이야기 속에서 내 상황을 조심스레 전했다. 회사에서 곧 퇴직하게 될 것, 초기투자액셀러레이터협회에서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 입사 취소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다가올 공백기와 미래에 대한 고민들까지.

교수님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KAIST에서 하셨던 과정을 GIST에서 이어가려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순탄치 않았고, 이제 또 다른 시작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내 고민과 상황이 과거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며,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대화 초반, 교수님이 물으셨다. “창업생태계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정말? 쉽지 않은데…”
송락경 교수님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의 롤모델과도 같은 분이었다. 유학시절부터 VC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고, 기업에서 경영과 사업 관련 경험을 쌓은 후 투자 관련 업무를 맡게 되신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내가 그리던 미래의 모습이었다. 나 역시 주식회사 트위니에서 상장 이후에는 지주회사의 CVC 개념으로 투자 대상과 신사업을 발굴하는 일을 하고 싶었으니까.
교수님의 이력은 놀라웠다. 투자관리시스템 개발 프로젝트 PM, 연구개발특구 단장,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장 등을 역임하셨다. KTB네트워크 투자심사역, KTB인큐베이팅(주) 대표, 대덕연구개발특구 지원본부 사업단장, KAIST 기술경영학과 초빙교수 겸 이노베이션센터소장까지. 기술금융, 인큐베이팅, 기술사업화 분야의 전문가로서의 삶이었다.
2시간 30분 동안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세 가지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첫째, 교수님이 초기투자액셀러레이터협회의 공성현 사무국장님에게 나에 대해 물어봤을 때 좋은 평가를 해주었고, 교수님과 잘 맞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전했다는 점이었다.
둘째,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삶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셨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사모펀드에서 GP가 유고하여 LP 중 유일하게 경력이 있는 본인이 업무를 맡으려 했을 때 이력 증명까지 해야 했던 이야기는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주었다.
셋째, 그리고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벤처캐피털타운’이라는 재단에 관한 이야기였다. 공동 설립자인 교수님의 후배가 유고하여 교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이끌고자 하지만, 현재 상황이 여유롭지 못하다는 설명이었다.
벤처캐피털타운의 비전은 명확했다. VC들에게 지역 거점 스타트업을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창업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것. 이 프로젝트에서 교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값진 경험과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의사를 표했다. “인턴으로라도 함께 일해볼 기회가 있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교수님은 금전적인 부분을 걱정하시는 듯했지만, 나에게는 가치 있는 경험이 더 중요했다.
마치 무협지에서 한때 최고의 문파를 일구고 잠시 은둔했던 고수가 무림에 재출현한 것 같았다. 친한 후배의 못다 이룬 꿈을 현실화하고자 인생의 마지막 큰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는 교수님의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구체적인 역할과 계획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우리는 서로에 대한 반가움과 감사함을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 만남에서는 왠지 교수님의 현업을 참관하며 속기록(교수님이 연구원들에게 필수적으로 익히게 한 역량이라고 했다)을 작성하게 될 것 같았다.
높게만 느껴졌던 벽 앞에서, 이제 작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문을 통해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기대와 설렘으로 다음 만남을 기다리게 되었다.